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문단 편집) ==== [[당숙종]], 영무에서 즉위하다 ==== [[충격과 공포|관중 방어군이 한큐에 풍비박살나버리고 가서한군의 패잔병들이 장안에 도착하면서 동관의 함락소식이 전해지자 당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이에 당현종은 [[촉나라|촉]]으로 비밀리에 피신할 것을 계획하고 일단 장안 사수를 결의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미 동관 함락소식이 전해져서 대부분의 조정대신들은 피난을 가거나 숨어든 상태였다. 결국 당현종 자신도 황실 일가족과 환관, 양국충을 비롯한 조정 대신 몇명과 해외에서 온 사신들을 이끌고 6월 13일, 장안을 떠나 지금의 [[사천]]으로 피신했다. [[헌제|하지만 몰래 도망치는 상황인데다가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먼 길을 가야 했기 때문에 첫날부터 호위병력이나 대신들, 사신들은 물론이고 황족들까지 식량이 떨어져 고생해야만 했다.]] 황제가 피란간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가져온 쌀에 보리와 콩을 섞어서 먹었다고 한다.[* 일단 당현종은 안사의 난을 불러들인 최종 책임자이나 의외로 들릴지 모르지만 말년까지 백성들의 원망을 심하게 산 적이 없었다. 말년에 당숙종 옹립파의 경계와 두려움을 산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도 피난을 떠나는 판국에 충분한 식량이 있을리가 없었고, 이에 호위 병력과 수행인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여기에 도망치던 피난통에 양국충은 '''[[나를 죽여줘|난 예전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 말했는데 황제가 안들은거야]]''' 하고 책임을 면피하고 다녔고,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황제 일행과 행동을 같이하던 토번 사신 20여 명이 굶주리고 피곤하다면서 양국충을 붙잡고 하소연한 것이 병사들의 눈에 띄자 "양국충이 호족 오랑캐와 더불어 반란을 모의하였다"면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양국충은 살해되었다. 이후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양귀비]]마저 자결한다. 일단 양씨 일가들이 진멸당하면서 가까스로 병사들을 안정시킨 당현종은 때마침 가서한의 패배 이후 간신히 황실 일행과 합류한 왕사례를 하서, 농우절도사직에 임명한 후 길을 재촉하는데 때마침 모여든 일대의 부로들이 관중을 떠나지 말 것을 간청했다. 당현종이 떠날 생각을 굽히지 않자 [[태자]]라도 남겨달라고 하자 당현종은 호위병력 2천여 명을 붙여 황태자(충왕 이형. [[당숙종]])에게 [[분조]]를 세울 것을 명하고 서북쪽으로 보냈다. 이후 당현종은 간신히 부풍까지 가서야 아직 떠나지 않은 관리들의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에 호위병사들이 아직도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당현종은 [[성도]]에서 올라온 비단 10만여 필을 뜰에 펼쳐놓고 호위병력들을 위무해서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운 후 성도로 들어갔다. [[파촉]] 지역은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지역이었기에 당현종은 그제서야 편히 쉴 수 있었고, 때마침 촉군장사였던 최원이 마중나오자 크게 기뻐하며 최원을 [[중서시랑평장사|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삼았다. 또한 황족 중 한 명인 농서공 이우를 [[한중왕]], [[양주]][[도독]], 산남서도 채방방어사로 임명하여 한중으로 파견해 방어임무를 맡겼다. 또한 하서의 여러 호족들이 당에 반기를 들자 하서병마사 주필을 하서절도사로 삼고 농우병마사 팽원요를 농우절도사로 임명한 다음 왕사례를 행재도지병마사로 삼아 하서, 농우 일대의 돌궐 [[부락]] 기미주들을 이끌고 파촉으로 들어와 이들을 관리하라고 명한다. 황태자인 충왕 이형은 분조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길을 나서나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이때 황태자의 아들들인 광평왕 이숙, 건녕왕 이담이 삭방번진으로 갈 것을 강력하게 건의하여 삭방번진 방향으로 향했다. >전하께서 옛적 일찍이 삭방절도대사가 되셨는데, 장리가 세시에 치계하여, 건녕왕이 대략 그 성명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하서, 농우의 무리가 모두 패배하여 적에게 항복해, 부형자제가 적중에 많이 있어, 혹 다른 꾀가 생길지 모릅니다. 삭방도는 가깝고, 사마는 모두 성하며, 배면은 의관 명족이니, 반드시 두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적이 장안에 들어가 바야흐로 노략질하여, 땅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이에 타고 속히 가서 그를 취하여, 천천히 대거를 도모하면, 이는 상책입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자치통감]]』'''}}} 즉, 하서, 농우는 불안하니 안녹산이 장안을 [[약탈|노략질]]하는 동안 재빨리 삭방도로 가서 병력을 끌어모으자는 것. 이에 황태자가 동의하고 동관에서 패해 흩어진 패잔병들을 불러모으면서 북상했다. 허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을 불러모으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병사들이 이탈하기도 했고,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과 도적떼들이 황태자 일행을 습격하기도 했는데, 이때 건녕왕 이담이 직접 창을 들고 부상까지 입어가면서 황태자를 호위했다고 한다. 이후 황태자 일행은 영무에서 7월 12일에 [[금군]]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으니 [[당숙종]]이다. 이러한, 황제의 허락 없는 황태자의 황제 즉위는 그 정통성이 매우 미약한 것으로써 자칫하면 [[반역]]으로 선언되어 황실 내의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현종은 비록 피난처인 촉의 특성상 숙종의 즉위 소식을 늦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즉위와 난의 책임을 과감히 인정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당숙종의 이러한 즉위과정은 이후에도 정통성 측면에서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숙종의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즉위시킨 신하들을 방위를 위해 이곳저곳에 배치하고 나자 문무 관원이 30명이 안 될 정도로 분조의 규모는 조촐했으며 풀밭에서 조정을 세워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약했다. 사람 손이 워낙에 없다보니 심지어는 이때 [[황후]][* [[첩]]일 수도 있다.]인 [[임신]]한 장량제는 영무에서 [[출산|자식을 낳고]] 4일 만에 일어나서 병사들의 옷을 꿰멨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에 박릉을 포위하고 있던 곽자의, 이광필. 그리고 안서번진, 하서번진 등에 명해 병사들을 이끌고 영무에 올 것을 명했으며, 명재상 [[이필]]을 불러들여 그나마 조정의 위엄을 조금식 세워갔다. 단, 숙종 시기 이필은 관직에는 올랐으나 거듭 사양했고 결국 재상직에 오르지는 않았다. 당숙종과 어린 시절 친구라는 명목으로 조언자로 활동했을 뿐이다.[* 이필과 함께 숙종의 또다른 친구였던 [[왕충사]]는 벌써 사망한 상태였다.] 곧 얼마 안 가 고선지의 부장이었으며 봉상청과 함께 용맹으로 유명한 하서절도부사 [[이사업]], 안서행군사마 이서균 등이 각각 5천여, 7천여 병력을 이끌고 영무로 도착했고, 곽자의, 이광필이 이끌던 삭방군이 5만여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영무에 합류하면서 비로소 조정으로써의 위세를 떨치며 군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숙종의 즉위와 양씨 일가에 대한 숙청은 안녹산 거병의 의미를 완전히 퇴색시켰고, 안녹산의 칭제까지 겹쳐 확고부동한 대의명분을 얻었다. 또한 당현종은 파촉으로 들어갈 때에 자신의 아들들을 여러 지방으로 파견해 지방의 단련, 단결병들을 기초로 한 지방군을 계속 장악하고 있을 것을 명했다. 이는 당현종이 아직 총기가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증거로 손꼽힌다. ~~단지 게을러져서 결국 반란을 초래했을 뿐이지만~~ 어쨌든 이런 종실제왕들을 확고하게 통제하고 상하관계를 명확히 하는데 황태자로써는 부족한 감이 있었으나 황제로써는 조칙과 제서를 통해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었기에 반격의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평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